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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N TV SHOW

오펜하이머 영화 내용의 실화 팩트 체크

by 망고푸딩이 2024. 3. 2.

영화 오펜하이머의 실화와 허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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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영국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고 상을 휩쓸어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그의 삶을 자세히 비추는 영화입니다. 그럼 이 영화는 사실만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아마도 영화의 서사를 위해 조금은 변형을 했을텐데 오펜하이머 영화가 사실과 비교해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바뀌었는지 알아봅시다.

 

10달러 내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


트리니티 실험 당일에는 많은 관계자들이 긴장하고 있었고, 영화에 나왔듯 원자폭탄이 대기를 태우며 파괴하여 전 세계를 전멸시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원자폭탄이 실제로는 놀랍게도 전혀 작동하지 않는 쪽에 내기를 걸었다고 합니다. 오펜하이머가 평소에도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백가지의 조건들이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었던 역사를 보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 입니다. 어쨌든 실제로 그는 10달러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동료 과학자 조지 키스티아코프스키의 월급에 걸었습니다. 물론 영화에도 나오듯이 원자폭탄은 실제로 작동했고 트리니티 테스트는 성공하게 됩니다. 또한 과학자들이 걱정했던 것 처럼 원자폭탄은 대기에 불을 붙이고 온 세상을 파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내기를 했고 실제로 원자폭탄 작동이 되지 않는 쪽에 내기를 걸었습니다.


 원자폭탄의 잠재력을 알지 못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은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이 세계를 파괴할 가능성에 대해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그로브스는 "그 버튼으로 이 세상이 파괴될 수 있단 겁니까?" 라고 묻고 오펜하이머는 "3년간 연구해봤지만 그걸 뒷받침할 증거는 못찾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레슬리 장군은 "그럼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묻고 이에 오펜하이머는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라고 확신하지만 레슬리는 "0이라면 안심이 되겠죠'라고 말하며 불안한 웃음을 짓습니다. 하지만 사실 레슬리 장군은 당시 원자폭탄의 전 세계 파괴 가능성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이 대화는 주로 원자폭탄이 대기를 파괴할 가능성에 대한 에드워드 텔러의 계산을 알고 있던 동료들, 자문을 구했던 아인슈타인 등 과학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진 태트록과 사실 약혼했었던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는 1936년 오펜하이머가 만난 정신과 의사이자 공산당 소속이었던 진 태트록(플로렌스 퓨)과 주인공인 오펜하이머와의 관계를 자주 그려내며 강조합니다. 두 사람은 약혼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결혼까지는 이르지 않고 청혼도 거절하는 등 만났다가 헤어졌다하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캐서린 키티(에밀리 블런트)를 만나 그녀와 관계를 시작하게 됩니다. 오펜하이머가 결혼을 하고도 진과의 친분을 이어갔고 영화에서 보이듯 키티와 진 사이에서 갈등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와 진이 결혼할 뻔했다는 사실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진 테트록에게 여러 번 청혼했습니다. 즉 태트록이 그를 받아줬다면 그는 키티보다 먼저 태트록과 결혼할 뻔했습니다.


원자폭탄의 사용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견해


영화 오펜하이머는 세계의 무기 경쟁에서 원자력을 이용해 원자폭탄을 만들고 그것이 장차 세계에 미치는 위험에 대해 우려했지만, 원자폭탄의 개발이나 사용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헷갈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노벨이 무기인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것 처럼 그는 원자폭탄이 앞으로 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걱정했지만 원자폭탄의 탄생에 대해 크게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내는데 필요한 필요악이라고 믿었지만, 정작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용하는 정치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서 원자 지식의 공유를 추진했지만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덜 비판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오펜하이머는 나치가 원자폭탄을 갖느니 미국이 원자폭탄을 갖는 것이 세계평화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는 그의 원자폭탄에 대한 우려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되버렸다"는 대사의 유래


영화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장면 중 하나는 오펜하이머가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버렸다"라는 대사를 사용한 장면입니다. 놀란 감독의 영화에는 트리니티 실험에서 가젯이 터지는 걸 보고 독백으로 나오고 오펜하이머와 진 태트록과 관계 장면에서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이 등장합니다. 두 번 인용한 모두 오펜하이머가 실제 생활에서 이 말을 사용한 정황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관계 중에 말한다는 것은 아무도 증명할 수 없으니 단지 놀란 감독이 영화를 위해 만들 복선 상황일 확률이 큽니다. 추후 진 태트록이 스스로 죽음으로써 오펜하이머에게는 파괴적인 고통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펜하이머는 1956년 NBC 뉴스 다큐멘터리 '폭탄 투하 결정'에서 이 대사를 말한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오펜하이머가 스승을 사과로 독살하려 한 사건


영화 오펜하이머의 시작 초기 장면에서, 22살의 청년 오펜하이머는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납니다. 여기서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도교수인 패트릭 블랙켓으로부터 케네스 브래너의 닐스 보어의 강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오펜하이머는 열받고 패트릭 블랙켓의 사과에 청산가리를 주입합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는 홧김에 저질른 독살에 대한 생각을 바꾸면서 사과를 회수하기 위해 연구실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반전은 사과를 들고 있는 사람은 블랙켓 교수가 아니라 보어입니다. 영화는 자칫하면 닐스보어를 우연히 죽일 뻔하게 돌아가며 오펜하이머는 한 입 베어먹기 전에 벌레먹은 사과라며 사과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자칫하면 이는 자신이 평생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게 될 닐스 보어를 죽이는 대재앙으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실제 친구인 프란시스 퍼거슨의 말에 따르면 패트릭 블랙켓을 독살하려 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실화 내용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습니다.  그가 시안화칼륨을 독극물로 사용했는지 어떤 물질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만약 블랙켓교수가 사과를 먹었다면 사망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랬을 확률은 극히 적습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가 불화가 있었다고 그의 교수를 살해하려 했다면  가혹한 처벌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대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실제 현실에는 없었지만 인연인 보어 교수를 추가하여 이 사건을 더욱 각색시켰습니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닐스 보어를 존경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와 보어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나타내기 위해 이야기를 변형한 것으로 보입니다. 

스트라우스의 프린스턴 제안을 수락하고 장기간 자리를 지킨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의 핵심 인물인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이 과학자에게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소장직을 제안한 인물이지만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고 적이 되어버립니다.  오펜하이머는 스트라우스에게 소장직 제안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하지만, 그가 제안을 수락했는지 거절했는지는 따로 언급된 것이 없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오펜하이머는 로스알라모스를 떠난 지 2년 뒤인 1947년에 스트라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등연구소(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이하 IAS)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화에 심도있게 나왔던 오펜하이머 보안인가 청문회를 하고 스트라우스가 장관임명 청문회에서 패배하여 낙마한 후에도 20년 동안 그 직책을 유지했습니다.
IAS 연구소장으로써 오펜하이머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사가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동문 주간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한참전인 1932년부터 IAS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프린스턴에 재직하는 동안 루이스 스트라우스가 원자력위원회의 수장이 된 후에는 오펜하이머와 스트라우스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를 공산주의자에 스파이로 누명을 씌워서 원자력, 핵무기 보안접근권을 아예 박탈시켜 버리려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마녀사냥 당한 청문회 결과와 상관없이 그는 1966년까지 약 20여년간 IAS에 남아있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 중 하나인 로스앨러모스


영화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거나, 장소 물색 장면 등을 다루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작업이 이루어진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오펜하이머 자신이 거주했던 주된 장소가 로스알라모스였기 때문입니다. 따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로브스장군은 실제로 테네시주 오크리지와 워싱턴주 핸포드에 있는 장소 또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습니다. 테네시 오크리지에는 원료인 우라늄을 농축하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전성기에는 테네시주에서 12,000명 이상의 근로자를 수용했습니다. 한편 워싱턴 핸포드에서는 플루토늄이 생산되었습니다. 원자로를 냉각하는데 필요한 냉각수인 북미 북서부에서 가장 큰 강인 컬럼비아 강이 있어 이상적인 장소였습니다. 로스앨러모스는 실제로 과학자들의 원자폭탄 설계와 개발이 이루어졌던 공간이었습니다.


 

동성애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진 태트록


오펜하이머 영화에서 진 태트록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지만 놀란의 영화는 진의 인생전반을 전부 다루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그녀의 자살은 타살이라는 주장도 있어, 실제로 영화에서는 중의적으로 다룬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진 태틀록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나오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태트록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여성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 당시 1900년대는 동성애는 고칠 수 있는 질환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녀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그런 성정체성에 대한 고군분투는 이전에 언급했던 약혼자였던 오펜하이머와의 관계가 끝나는 데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1943년 태틀록이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으로만 진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녀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놀란의 영화는 흑백장면은 실제 역사를 묘사하거나 전후의 시간대를 나타내며 컬러장면들은 오펜하이머의 관점을 나타내거나 트리니티실험을 묘사하는 등 색으로 주관, 객관적인 내용을 구분했는데 그런 비슷한 맥락으로 진과 오펜하이머의 관계만 집중해 보여줍니다.


오펜하이머를 '울보'라고 부른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오펜하이머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손에는 피가 묻어있는 것 같다고 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명령을 내려 폭탄을 투하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사람들이 누가 그 폭탄을 만들었는지 신경이나 쓸 것 같냐고 쏘아붙이며 정색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오펜하이머를 울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 오펜하이머는 이 사건을 조금 변경했습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트루먼이 오펜하이머와 백악관 독대를 한후 오펜하이머에게 대놓고 "징징대는 애는 여기 들이지마"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의 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레이 몽크의 '로버트 오펜하이머: 센터 안의 삶'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사석에서 오펜하이머를 '울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보안 청문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오펜하이머 영화의 마지막 3분의 1은 오펜하이머와 스트라우스의 청문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오펜하이머의 보안 허가 청문회는 주로 그의 공산주의자 인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에드워드 텔러가 지지한 수소폭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의 허가가 취소되었습니다. 스트라우스가 오펜하이머에가 앙심을 품은 것이 청문회를 시작하도록 했다면,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수소폭탄 개발을 주장한 텔러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격렬한 반대였습니다. 텔러와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갈라서게 되었고, 텔러는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그를 배신한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던 요인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계속해서 오펜하이머는 FBI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며, 그의 공산주의자 친구들과의 관계와 맞물려 청문회 최고위원 3인의 최종 투표 결과가 2:1이 되어 오펜하이머 보안인가 갱신이 비승인나도록 만들었습니다.